공주농악
참가 지역 :충청남도참 가 팀 :공주농악보존회
참가 종목 :농악
공주농악은 마을에서 전해지는 지역 농악을 정립한 형태로, 공주시의 옛 전통시장인 공주장에서 펼쳐지던 걸립 풍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충청도에서는 특히 두레농악이 발달했는데, 공주농악 역시 그러한 형태를 띤다. 전체 판제는 열네 마당으로 구성되는데, 각각 가락이 뚜렷하고 대진과 놀음이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지리상으로 가까운 대전의 웃다리농악과 유사한 지점도 많이 발견된다.
종 목
곰에 얽힌 설화가 숨 쉬는 곳
공주의 명승지이자 옛 지명이기도 한 고마나루에는 오래전부터 인간과 곰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연미산 근처 굴에 살던 암곰이 한 사내를 납치해 함께 살았고 그 사이에서 두 번째 새끼를 낳았는데, 사내가 굴을 탈출하자 암곰이 새끼들과 함께 그 뒤를 따라가다 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사내가 건너온 강가의 나루를 고마나루 또는 곰나루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마나루를 한자어로 읽으면 ‘웅진’으로, 백제 웅진 시기의 지명과 같다. 백제 시대의 왕도였고, 고려 시대에는 주요 교통로로 기능한 이곳은 주변 국가와의 교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굽이치는 금강을 따라 위치한 공주는 오늘날 풍부한 문화적 자산과 역사를 품고 여전히 충청남도의 중심지로 자리하고 있다.
‘공주농악’의 시작
공주농악은 마을에서 전해지는 지역 농악을 정립한 형태로, 공주시의 옛 전통시장인 공주장에서 펼쳐지던 걸립 풍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충청도에서는 특히 두레농악이 발달했는데, 공주농악 역시 그러한 형태를 띤다. 19세기 공주읍 검상동에서 주로 연행되던 농악은 1940년대 들어 최향래를 중심으로 한 우성면 동대리 농악대가 패를 쥐게 된다. 동대리 농악대에서 활동한 김태산과 대전 웃다리농악 예능보유자 송순갑은 1959년까지 공주농악을 이끌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도 손을 놓지 않고 우리의 농악을 꾸준히 견인해온 김태산 덕분에 현재까지 공주농악이 이어지고 있다.
전체 판제는 열네 마당으로 구성되는데, 각각 가락이 뚜렷하고 대진과 놀음이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지리상으로 가까운 대전의 웃다리농악과 유사한 지점도 많이 발견된다. 남사당패와 관련 있는 칠채와 쩍쩍이가락이 존재하고, 돌림벅구·당산벌림·오방진·열십자걸이·사통백이 등 판제 역시 흡사하다. 편성은 꽹과리(4명)·징(3명)·제금(2명)·장구(8명)·북(8명)·소고(10명)에 피조리(8명)·기수(5명) 등이다.
_주목! 이 장면
공주농악의 핵심이자 다른 농악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 바로 쌍방울진이다. 연행자들의 재주와 놀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마당이니 놓치지 말 것. 이외에 단체놀이를 펼치는 당산벌림과 소리굿, 무동 태우기를 눈여겨볼 만하다.
인물 이야기
“가락으로 전해진 우리 농악의 맥을 잇다”
_정철기(공주농악보존회 회장)
공주농악은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농악 부문에서 두 번이나 장원을 차지할 정도로 유서가 깊은 농악입니다. 공주시 검상동과 동대리에서 농악을 오랫동안 가르쳐온 최향래 선생님과 의당면 수촌리에서 농악을 이어온 김태산 선생님에 의해 맥을 이어왔고, 공주농업고등학교를 통해 설립된 공주농악보존회가 1986년부터 전승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부이신 정점룡 선생님과 김태산 선생님의 농악대 인연으로 그 쇠가락을 전수했습니다.
기존 웃다리농악에 견주어 볼 때 공주농악은 장구 매는 법이나 쇠 치는 가락, 진법 모두 차이를 드러나는 독자적인 농악입니다. 특히 쌍방울진에서 사용되는 장고 크기가 기존보다 크며, 쇠가락이 다양하고, 악기잽이가 무동을 태우는 장면이 등장하는 게 특징이지요. 이런 마당에 주목해서 보면 무대를 더욱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공주농악보존회는 농악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공연과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이번 축제 참가자는 70대 어르신부터 20대까지 총 54명으로 구성됩니다. 일반 연행자들과 전공자가 섞여 있고, 남녀 비율은 반반 정도입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이번 한국민속예술제를 통해 공주농악을 알리고, 미래를 나아가는 초석을 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