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고무
우아하면서도 다채롭게
부산 동래구는 예로부터 항구에 인접해 각종 물자와 사신이 드나드는 풍요의 중심이었다. 조선 시대 최대 관문이었던 이곳에 사신을 대접하는 동래교방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풍류와 가무가 꽃을 피웠다. 동래고무는 원래 고려 전기 궁중악을 관장했던 교방청敎坊廳의 기생들이 추던 춤이었으나, 조선 시대 때 동래감영의 교방으로 전해지면서 지역 특성에 따라 동래고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기원을 거슬러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충렬왕 때 이혼이라는 양반이 바다로 떠내려오는 뗏목을 주워 북을 만들었는데, 그 북소리가 굉장하여 사람들이 북을 치며 춤을 추었다”고 한 데서 시작된 것으로 분다. 이때 무고는 “한 쌍의 나비가 꽃을 감아 도는 것 같고, 두 마리 용이 용맹스럽게 여의주를 다투는 것 같다”고 묘사돼 있다.
그러나 1905년 지방 감영이 폐지되자 교방청도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1915년 기생들이 기녀조합을 형성하고 1920년 전후 동래권번과 봉래권번이 창설되면서, 이때 동래관아에서 추던 동래고무와 검무 등이 다시 전래되었다. 광복 직후까지 가끔씩 이어지던 고무도 권번의 폐지와 함께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는데, 1984년 당시 동래권번 마지막 출신의 고증을 받아 발굴 작업이 시작된 후 다시 전수되고 있다.
동래고무는 장단의 변화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중앙에 큰북을 놓고 4명의 무원과 함께 군무를 이루어 8고무를 형성해 진행한다. 대표적 춤사위는 머리사위·뿌림사위·맞춤사위·옆실이·팔수사위·북춤사위·팔자사위 등이다. 섬세하면서 단아하고 단조롭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변화를 더하며 화려하게 피어난다. 이는 궁중 정재의 특성과 동래의 향토적 성격을 모두 갖추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절제미를 통한 우아한 품격은 궁중 정재의 엄격한 규칙에, 자유분방하면서도 화려한 기운은 동래 특유의 활기찬 흥에서 유래했다.
춤의 곡조는 영산회상 중 잔영산·염불·도드리·자진타령·타령·군악 순으로 진행되며 피리와 해금·장구·대금·북으로 연주한다. 궁중음악인 향당교주와 민속음악인 삼현육각, 가창인 지화자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복식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원무는 궁중 복식, 협무는 평복을 입고 진행한다. 원무와 협무의 적절한 춤사위 조화는 궁중 정재의 기본 사상인 음양오행을 표상화한 것으로 본다.
동래고무는 느린 춤동작에서 빠른 춤동작으로 진행되는 상승구조를 나타내는 춤이다. 북을 중앙에 두고 원무가 사방에서 추는 오행작대를 기본 패턴으로, 주로 좌선으로 이동하면서 원무와 협무가 서로 교차하는 복합적인 춤길을 나타낸다. 세령산의 장단에 맞추어 등장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동래고무의 절정부에서 원무의 북 치는 소리와 협무의 “지화자” 소리가 어우러져 화려한 나비떼를 보는 듯 어우러지는 장면은 동래고무의 화려함이 만개하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장면 구성
1. 등장태
무원이 염수하여 등장하여, 상대무와 상배무, 평사위, 어깨 맞이 등의 춤사위를 행한다.
2. 원무
잔영산·염불·도드리 등의 장단에 맞추어 북을 가운데 두고 춤사위를 펼친다.
3. 원무/협무
창사(지화자)·자진타령·타령 등으로 원무와 협무가 어우러져 춤 사위의 절정을 이루며, 마치 함박꽃이 활짝 피어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