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진밭두레 농악
‘함께’의 가치를 담은 소리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한 고양시는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서쪽으로는 낮은 구릉과 하천 퇴적지인 곡저평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산과 우암산을 이웃하고 서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니 사람이 터전을 잡고 살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을 테다. 또한 고양은 가장 오래전 농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5020년 전, 서기 2000년경에 사람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와지볍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재배벼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고양이 한반도 농경문화의 기원이며 한강문화권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해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한반도 농사의 기원을 품고 있는 도시답게 이곳은 농경 사회를 중심으로 문화예술도 풍부하게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진밭두레농악은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진밭마을에서 전승되어 왔으며 농사일을 할 때 두레를 짜고, 두레패가 농사일의 흥을 돋우기 위해 연행하던 농악이다. 두레는 농촌 사회의 핵심 역할을 하는 자발적 공동체였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돕고, 일손이 필요할 때는 함께 일하며, 마을의 질서를 깨뜨리거나 어지럽히는 일을 막았으며 마을마다 두레를 표시하는 깃발도 존재했다.
모내기에서 물대기, 김매기, 벼베기, 타작까지 이르는 논농사 경작을 위한 모든 과정에 두레가 함께 일했으며, 특히 많은 인력이 합심해야 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거의 반드시 두레가 동원됐다. 물론 마을의 공동 잔치로 진행하는 풋굿이나 호미씻이와 같은 논농사 이후 놀이의 중심에도 두레가 있었다. 대체로 모내기나 추수를 마친 뒤 공동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누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농사로 인한 노고를 잊고 결속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두레패와 마찬가지로 진밭두레 역시 조선 초기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침체를 겪었다. 당시 일제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농촌의 농악과 두레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진밭마을은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 당시 농기에 태극기를 달고 참여하였고, 이후 진밭두레와 농악패를 재결성해 100년간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오늘날 진밭두레 농악에는 옛 농경 공동체 생활 풍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산신에게 제를 지내는 산제사에서부터 농사소리, 농사놀이, 상여소리, 회 다지소리, 지경소리, 대보름 쥐불놀이, 농악놀이까지 한 당시 지역민들의 생활문화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진밭두레패는 변주가락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일반적인 연희 농악과 다르게 기본 가락에 충실하면서도 장단마다 끊어치며 만들어내는 웅장함이 일품이다. 다른 농악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악기인 제금을 사용하며, 법고 수도 많다. 특히 농악패와 농사꾼이 진을 짜면서 연주와 놀이가 어우러지는 놀이 판제인 농사놀이에서 을乙자진·원진·멍석말이·방울진·십자진·사각진(사통백이) 등 다양한 진법을 구사하여 놀이의 총체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주요 장면 구성
1. 길맞이
농악대는 농사일을 마친 농부를 맞이하고, 농부와 함께 마을로 입성하며 흥을 돋아 힘든 노역의 시름을 달래며 즐긴다.
2. 제1당산놀이
관중(마을주민)이 보고 즐길 수 있게 당산을 벌리고 농부들이 농악패의 장단가락에 흥겨워 즐기는 판으로 계절에 따라 농사놀이 16가지 중 2~3가지의 놀이를 시기와 계절에 따라 펼치며 즐기고
농악패가 거기에 화답하는 소고놀이를 펼친다.
3. 사방치기와 네줄백이
이 대목은 옛 변방의 사주경계와 제식훈련과 같은 놀이로 민첩하고 일관성 있는 행동으로 단합된 모습을 놀이로 표현하는 놀이 마당이다.
4. 제2당산놀이
제1당산놀이는 현재 진행되는 농사놀이라면 제2당산놀이는
다음에 할 작업을 시연하는 대목으로 농부들이 호홉을 맞추며 노는 대목이다. 상항에 따라 지경다지기, 회다지 등등 마을의 단합이 필요한 두레패의 여러 놀이가 합류하기도 한다.
5. 사통백이와 방울진
사통백이는 옛 군사적 사각진법과 같은 놀이로 사각형을 만들어 좌우전후가 서로 엇갈려가며 가세치기를 한 후 사방에 원을 만들고 풀어 중앙에 방울진을 한다.